일본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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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jungeol 작성일 24-06-06 13:23 조회 481 댓글 0본문
최근, 몇달동안 일본이 떠들석하다.
K-Pop, K-Drama와 같이 문화적인 이벤트로 떠들석하다면 그 나름대로 쬐끔 어께에 힘이 들어갈 만 하다마는... (쩝!)
실상이 아니라서 참 가슴이 메어오는 심경이다.
박 혁이라는 (일본에선 브라더 혁이라고 호칭한다) 그 브라더가 전국집회 투어를 통해서 일본의 부흥이라는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야말로 BTS콘서트를 능가하는 바람몰이로 이어가고 있다. 언제부터 일본인들이 이런 집회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지
불가사의하고 수수께끼와 같은 현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한편 믿겨지질 않는다.
일본인들은 왜 그 브라더 혁의 한마디와 손짓 몸짓에 열광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우리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싶다.
지금부터 어언 20년전에 이 목사님의 말씀사역이 시작되었다. 2005년 일본 말씀공부 때 첨 적기 시작한 노트를 다시
꺼내 보면서 새삼 시간과 공간속에 갖혀 있는 한정된 인간의 삶이 참으로 무상하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참 복음의 값어치, 가치를 알뜰하게 잊은채 둔감한 본능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내 자신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결론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진짜가 각광을 받고 스포트 라이트를 받아야 마땅할 텐데, 가짜가 더 인기가 올라가고 있으니 참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쩜 우리 목사님의 말씀강해 내용은 왜 유투브에서 인기가 없으며 왜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런 강해를 하려고 하지 않는가
늘 말씀 방송 때 보면, 100여명이 넘게 등록되어 있지만 듣는자는 고작 2,30여명이 전부다.
이 목사님의 말씀정도 된다면 강남의 내노라 하는 큰 교회에서 우리가 배우고 있는 말씀강해를 시리즈로 몇일간이고 배우려
덤벼들어도 모자랄 텐데 하면서... 허기사,, 참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에도 옆에 붙어 3년간이나 쫓아
다닌 제자들 조차 깨닫지 못했으니 지금의 우리 현실이야 오죽하려만,,,
진리는 외롭고 고독하다. 정말 우리 몸에 좋은 음식은 쓰고 맛이 없다. 좋은 말씀은 재미가 없다.
고착된 생각과 고정관념속에서는 들을 만한 귀가 열리길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내 자신 스스로도 꼴나게 배웠다는 자만심과 수십년 간 어께 너머로 들은 풍월은 있다는 개똥 철학속에 빠진 나머지 한번
들어보자... 들어보고 판단하자 ..
게다가 지적인 판단과 상식적인 논리로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결과가 지금의 말씀공부의 끈을 놓지 않기로 결심으로 이어졌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기준은 100인 100색 모두가 다른 것이 분명하다.
중략,
다시 브라더 혁의 활약(?) 스토리로 돌아가 본다.
집회의 내용은 이미 유투브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장풍을 불어주면 퍽 퍽 넘어가고 쓰러지고 거품을 토해내며
자빠지는 퍼포먼스는 물론, 손대는 자마다 괴성을 지르면서 귀신과 악령이 내 쫓겨진다고 참석한 모두가 열변을 토하며 간증
하고 있다.
물론 그런 퍼포먼스를 한편으로 정밀하게 분석하여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비판하고 있는 단체나 개인들도 한쪽에선 존재한다.
사실 솔직한 느낌이라면 나 역시도 뭔가 보여주는 장면은 어 진짜같은데,,, 하며 팩트라는 명제에 끌리고 내 눈으로 확인했다
라고 하는 증인의 본능이 작동하게 되기에 분명히 엄청난 파괴력과 자극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12제자 중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토마스가 생각난다. 사실 늘 그 부분의 말씀은 읽고 있었는데 도대체 왜 디두모란 단어에는
관심이 없었을까? 인본적인 내면과 영적인 내면이 함께 존재한다는 쌍둥이 논리를 듣고 깨닫는 순간 뇌속의 세포에 전기가
감전되어 한순간 멍하니 허공을 처다본 내 자신의 처량했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보이는 것에 구속되어 내 눈으로 내 손으로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노라 외쳤던 도마의 주장이 비단 도마의 역사적인
제자의 대사로만 돌리고 끝낼 수 있겠는가? 반면 지금의 나는 어떤가 ?
브라더 혁의 퍼포먼스에 열광하고 쓰러지고 거품을 토해내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주 아주 머리속이 복잡해 진다.
어떤 일본인은 이렇게 외친다. " 브라도 혁은 진정한 이 시대의 선지자다. " "일본의 부흥을 일으키는 키맨이다"
어떤 부흥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그 브라더 혁이란 친구의 마이크로 전해지는 설교 패턴은 정해져 있다.
우선 비교적 쉬운 영어의 유창한 발음을 통해서 특유의 제스쳐와 억양으로 전달된다.
단상의 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광경 또한 모인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언변의 톤은 웅변의 연사와도 같다.
(일본 문화적으로 비춰보면 그런 연사의 열변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기에 아주 신선하고 쇼킹한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들어보면 성경 말씀의 인용이나 그 해석 또는 비유로 표현된 말씀의 해석이나 강해 또는 설명등은 전혀 없다.
비유가 아니면 그 어떤 말씀도 예수님은 전하지 않으셨다 라는 사실을 근거한다면 그 어려운 비유의 말씀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줄 만도 한데... 일체의 인용이나 부연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통상적인 부흥사의 패턴과 아주 흡사하다.
다만, 자신이 하나님으로 부터 이런 계시를 듣고 이렇게 가라고 성령이 지시해 주셨다는 것을 몇번이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사실, 내용면으로 본다면 강남의 유명한 대형 교회 목사가 전하는 설교보다 더 은혜스럽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개인적 견해)
근데, 브라더 혁에게 안수를 받으면 병이 낫고 악령이 나간다는 소문이 모이는 자들의 머릿속에 끈끈하게 자리잡고 있기에
구름떼 처럼 모여들기 시작한다. 마치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따라다니기 시작한 엄청난 군중
들과 매한가지 다를바가 없다. 손을 들고 열광하며 한번이라도 더 만져주고 터치 받기를 열망한다.
동시에 찬양리더들은 마이크를 통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쏼라 쏼라 ! 방언으로 분위기를 한층 끌어 올려준다.
피아노 주자는 체르니 보다도 프리 째즈 피아노 연주 보다도 더 어렵고 난해한 건반의 자극적인 소리로 분위기를 받쳐준다.
절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어쩜,,, 70년대의 부흥사 퍼포먼스를 아주 현대적으로 각색시킨 모던 표현 예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1970년대 한얼산 기도원 집회가 재현되고 있다. 라고 해도 ...
다시말해 예수는 조연이고 주연은 딴 사람이 맡는다는 것과 다를바 없다. 목적은 예수를 통해 거듭나고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고 우선은 병이 낫고 알지도 못하는 악령으로 부터 해방되는 것이 믿음이라는 논리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진짜로 악령에 걸려 있는지 아닌지의 분별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쓰러지면 악령이 떠난것이 되고 거품을 물면 악령이
나가고 있다는 것으로 직결되고 소문으로 이어진다. 왜 일단은 보여지는 광경으로 본 사람들이 있으니까...
근데,,, 바알세블도 그런 퍼포먼스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역설이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도 그렇게 예수를 빗대어 놀렸지 않은가? 근데도 자빠지지 않는 사람이 나오니까 이게 또 문제가 된다.
한편, 브라더 혁 주변에는 아주 충성스런 참모들이 존재한다. 대게 그릇된 종교집단의 특성이 다 그렇듯이,,, 그 참모들의
기획과 각색된 시나리오는 아주 새로운 아이디어와 플랜으로 브라더 혁의 존재와 움직임을 뒷받쳐 주고 있다.
브라더 혁의 집회 준비르르 위해 금식기도하자고 라인 단체방에 들어온 사람이 일주일 사이에 150여명이 넘는다.
매일 같이 금식 담당자의 이름이 넷트를 통해 전달된다. 재밋는 건, 일본 사람들은 무슨 사정으로 금식이 어려워지면 라인단체방에
오늘 금식은 못하게 되었다고 공식 보고한다. 아무 말 없는 사람은 금식을 실행한 것이 된다.
(우리가 배운 금식에 대한 말씀을 다시 한번 찾아 보면 좋으련만...쩝..)
결론은 대한민국이 발전도상 시절 즉 1970년대 부터 엄청난 파괴력을 갖기 시작한 부흥강사가 다시 일본에 도래한 것이다.
그 당시의 부흥강사의 한마디 한 동작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감격하고 감사했으며 넘어지고 은혜가 쏟아 졌다고 한다.
그런 부흥사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교회는 외형상으로 비대해 졌으나 오랜기간 질적으로 퇴행하고마는 작금의 결과로 이어졌다.
그결과 코로나 충격으로 교회를 팔고 사는 해프닝이 심심치 않게 ....
지금의 시대는 부흥사가 절대 인기를 누렸던 그런 시대와는 완판 다른 상황이다. 어쩌다 실수로 교회에서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인터넷이라고 하는 가상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무참히 두들겨 맞고 얻어 터지고 찢겨져 버려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토론과 상담 그리고 대화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들의 기성세대는 그져 내편과 적이라고 하는 이분법으로 분류되어 색깔이 바뀌고
만다. 세상 대화속에서는 공정과 상식적인 절차를 강조하고 있으나, 유독 교회속에는 공정이나 상식적인 절차 등은 아랑곳 없어
목사와 장로들의 담합으로 결론이 끝나 버린다.
세상은 반드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외치는데 유독 교회속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과 다를 바 없이 편향적이고 권위적인
힘이 모든걸 지배해 버린다.
너희들이 장로들의 전통은 따르면서 하나님의 율법은 져 버리고 있다라고 지적하신 예수의 말씀을 우리는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
하고 뒤돌아 봐야 할 것이다. 교회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 우리 목사님을 해꽂이 하면 천벌 받는다는 논리로 결론을 끝내 버린다.
항상 기준은 성경속 말씀만이 되어야 한다. 그 기준점이 사람의 말로 슬쩍 바뀌어진 상황을 우리들은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유혹되고 현혹되는 지금의 우리들의 믿음의 현실에서 정말 우리들은 좁은 길로 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
지난달, 브라더 혁 집회 실무위원으로 부터 오사카 집회 때 통역을 맡아 달라고 의뢰를 받았다. 한 때는 적지에 뛰어 들어
아주 맛있는 알바 개념으로 거금의 알바비를 챙겨 보겠다고 잘난채하고 의기양양 했었다. 했었다. 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도 그 의뢰를 받았을 때는 도마와 같은 두 마음의 심경이 왕성하게 작동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두 달치 생활비를 하루만에 벌어 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남기로 했다. (인간적으론 솔직히 아깝다,ㅋ)
이토록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처참하게 결투를 벌였던 적이 있었던가 하면서 스스로 너털 웃음과 기가차서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유혹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에게 유혹의 사탕을 던져 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글로나마 표현하고 나니 조금은 후련해 진다. 하마터면 알바비 유혹에 나의 믿음의 정체성을 잃어 버릴 수 있었던 한순간의
아찔한 순간을 지내고 나니 그 다름대로 편안하다.
에바다가 올해로 창립된지 50살이 되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찬양선교단체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아마도 세상속 사회적인 단체라고 한다면 매스컴에도 떳을 것이다.
허나, 지금의 에바다의 모습이 더 어울리고 멋지고 자랑스럽다. 어느 한분이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이런 에바다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이 수다 떨면 듣는 사람이 뻥치지 말라고 한다. 그런게 요즘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핀잔을 듣는다.
너 있는 곳에서 주 찬양하라... 에바다의 프라이드는 이 세상 사는 동안만의 유한적인 감정이요 유한적인 나 스스로의 심취함
이라 하더라도 그 프라이드는 무한하고 값진 보화이며 돈으로 구할 수 없는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왜나하면 20년 전에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된 신앙에서 보이지 않는 말씀속의 그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향후 50년을 이끌고 갈 수 있는 우리들의 후배들이 나타나길 간절히 소망하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K-Pop, K-Drama와 같이 문화적인 이벤트로 떠들석하다면 그 나름대로 쬐끔 어께에 힘이 들어갈 만 하다마는... (쩝!)
실상이 아니라서 참 가슴이 메어오는 심경이다.
박 혁이라는 (일본에선 브라더 혁이라고 호칭한다) 그 브라더가 전국집회 투어를 통해서 일본의 부흥이라는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야말로 BTS콘서트를 능가하는 바람몰이로 이어가고 있다. 언제부터 일본인들이 이런 집회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지
불가사의하고 수수께끼와 같은 현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한편 믿겨지질 않는다.
일본인들은 왜 그 브라더 혁의 한마디와 손짓 몸짓에 열광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우리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싶다.
지금부터 어언 20년전에 이 목사님의 말씀사역이 시작되었다. 2005년 일본 말씀공부 때 첨 적기 시작한 노트를 다시
꺼내 보면서 새삼 시간과 공간속에 갖혀 있는 한정된 인간의 삶이 참으로 무상하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참 복음의 값어치, 가치를 알뜰하게 잊은채 둔감한 본능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내 자신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결론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진짜가 각광을 받고 스포트 라이트를 받아야 마땅할 텐데, 가짜가 더 인기가 올라가고 있으니 참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쩜 우리 목사님의 말씀강해 내용은 왜 유투브에서 인기가 없으며 왜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런 강해를 하려고 하지 않는가
늘 말씀 방송 때 보면, 100여명이 넘게 등록되어 있지만 듣는자는 고작 2,30여명이 전부다.
이 목사님의 말씀정도 된다면 강남의 내노라 하는 큰 교회에서 우리가 배우고 있는 말씀강해를 시리즈로 몇일간이고 배우려
덤벼들어도 모자랄 텐데 하면서... 허기사,, 참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에도 옆에 붙어 3년간이나 쫓아
다닌 제자들 조차 깨닫지 못했으니 지금의 우리 현실이야 오죽하려만,,,
진리는 외롭고 고독하다. 정말 우리 몸에 좋은 음식은 쓰고 맛이 없다. 좋은 말씀은 재미가 없다.
고착된 생각과 고정관념속에서는 들을 만한 귀가 열리길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내 자신 스스로도 꼴나게 배웠다는 자만심과 수십년 간 어께 너머로 들은 풍월은 있다는 개똥 철학속에 빠진 나머지 한번
들어보자... 들어보고 판단하자 ..
게다가 지적인 판단과 상식적인 논리로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결과가 지금의 말씀공부의 끈을 놓지 않기로 결심으로 이어졌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기준은 100인 100색 모두가 다른 것이 분명하다.
중략,
다시 브라더 혁의 활약(?) 스토리로 돌아가 본다.
집회의 내용은 이미 유투브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장풍을 불어주면 퍽 퍽 넘어가고 쓰러지고 거품을 토해내며
자빠지는 퍼포먼스는 물론, 손대는 자마다 괴성을 지르면서 귀신과 악령이 내 쫓겨진다고 참석한 모두가 열변을 토하며 간증
하고 있다.
물론 그런 퍼포먼스를 한편으로 정밀하게 분석하여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비판하고 있는 단체나 개인들도 한쪽에선 존재한다.
사실 솔직한 느낌이라면 나 역시도 뭔가 보여주는 장면은 어 진짜같은데,,, 하며 팩트라는 명제에 끌리고 내 눈으로 확인했다
라고 하는 증인의 본능이 작동하게 되기에 분명히 엄청난 파괴력과 자극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12제자 중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토마스가 생각난다. 사실 늘 그 부분의 말씀은 읽고 있었는데 도대체 왜 디두모란 단어에는
관심이 없었을까? 인본적인 내면과 영적인 내면이 함께 존재한다는 쌍둥이 논리를 듣고 깨닫는 순간 뇌속의 세포에 전기가
감전되어 한순간 멍하니 허공을 처다본 내 자신의 처량했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보이는 것에 구속되어 내 눈으로 내 손으로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노라 외쳤던 도마의 주장이 비단 도마의 역사적인
제자의 대사로만 돌리고 끝낼 수 있겠는가? 반면 지금의 나는 어떤가 ?
브라더 혁의 퍼포먼스에 열광하고 쓰러지고 거품을 토해내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주 아주 머리속이 복잡해 진다.
어떤 일본인은 이렇게 외친다. " 브라도 혁은 진정한 이 시대의 선지자다. " "일본의 부흥을 일으키는 키맨이다"
어떤 부흥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그 브라더 혁이란 친구의 마이크로 전해지는 설교 패턴은 정해져 있다.
우선 비교적 쉬운 영어의 유창한 발음을 통해서 특유의 제스쳐와 억양으로 전달된다.
단상의 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광경 또한 모인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언변의 톤은 웅변의 연사와도 같다.
(일본 문화적으로 비춰보면 그런 연사의 열변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기에 아주 신선하고 쇼킹한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들어보면 성경 말씀의 인용이나 그 해석 또는 비유로 표현된 말씀의 해석이나 강해 또는 설명등은 전혀 없다.
비유가 아니면 그 어떤 말씀도 예수님은 전하지 않으셨다 라는 사실을 근거한다면 그 어려운 비유의 말씀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줄 만도 한데... 일체의 인용이나 부연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통상적인 부흥사의 패턴과 아주 흡사하다.
다만, 자신이 하나님으로 부터 이런 계시를 듣고 이렇게 가라고 성령이 지시해 주셨다는 것을 몇번이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사실, 내용면으로 본다면 강남의 유명한 대형 교회 목사가 전하는 설교보다 더 은혜스럽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개인적 견해)
근데, 브라더 혁에게 안수를 받으면 병이 낫고 악령이 나간다는 소문이 모이는 자들의 머릿속에 끈끈하게 자리잡고 있기에
구름떼 처럼 모여들기 시작한다. 마치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따라다니기 시작한 엄청난 군중
들과 매한가지 다를바가 없다. 손을 들고 열광하며 한번이라도 더 만져주고 터치 받기를 열망한다.
동시에 찬양리더들은 마이크를 통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쏼라 쏼라 ! 방언으로 분위기를 한층 끌어 올려준다.
피아노 주자는 체르니 보다도 프리 째즈 피아노 연주 보다도 더 어렵고 난해한 건반의 자극적인 소리로 분위기를 받쳐준다.
절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어쩜,,, 70년대의 부흥사 퍼포먼스를 아주 현대적으로 각색시킨 모던 표현 예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1970년대 한얼산 기도원 집회가 재현되고 있다. 라고 해도 ...
다시말해 예수는 조연이고 주연은 딴 사람이 맡는다는 것과 다를바 없다. 목적은 예수를 통해 거듭나고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고 우선은 병이 낫고 알지도 못하는 악령으로 부터 해방되는 것이 믿음이라는 논리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진짜로 악령에 걸려 있는지 아닌지의 분별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쓰러지면 악령이 떠난것이 되고 거품을 물면 악령이
나가고 있다는 것으로 직결되고 소문으로 이어진다. 왜 일단은 보여지는 광경으로 본 사람들이 있으니까...
근데,,, 바알세블도 그런 퍼포먼스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역설이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도 그렇게 예수를 빗대어 놀렸지 않은가? 근데도 자빠지지 않는 사람이 나오니까 이게 또 문제가 된다.
한편, 브라더 혁 주변에는 아주 충성스런 참모들이 존재한다. 대게 그릇된 종교집단의 특성이 다 그렇듯이,,, 그 참모들의
기획과 각색된 시나리오는 아주 새로운 아이디어와 플랜으로 브라더 혁의 존재와 움직임을 뒷받쳐 주고 있다.
브라더 혁의 집회 준비르르 위해 금식기도하자고 라인 단체방에 들어온 사람이 일주일 사이에 150여명이 넘는다.
매일 같이 금식 담당자의 이름이 넷트를 통해 전달된다. 재밋는 건, 일본 사람들은 무슨 사정으로 금식이 어려워지면 라인단체방에
오늘 금식은 못하게 되었다고 공식 보고한다. 아무 말 없는 사람은 금식을 실행한 것이 된다.
(우리가 배운 금식에 대한 말씀을 다시 한번 찾아 보면 좋으련만...쩝..)
결론은 대한민국이 발전도상 시절 즉 1970년대 부터 엄청난 파괴력을 갖기 시작한 부흥강사가 다시 일본에 도래한 것이다.
그 당시의 부흥강사의 한마디 한 동작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감격하고 감사했으며 넘어지고 은혜가 쏟아 졌다고 한다.
그런 부흥사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교회는 외형상으로 비대해 졌으나 오랜기간 질적으로 퇴행하고마는 작금의 결과로 이어졌다.
그결과 코로나 충격으로 교회를 팔고 사는 해프닝이 심심치 않게 ....
지금의 시대는 부흥사가 절대 인기를 누렸던 그런 시대와는 완판 다른 상황이다. 어쩌다 실수로 교회에서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인터넷이라고 하는 가상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무참히 두들겨 맞고 얻어 터지고 찢겨져 버려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토론과 상담 그리고 대화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들의 기성세대는 그져 내편과 적이라고 하는 이분법으로 분류되어 색깔이 바뀌고
만다. 세상 대화속에서는 공정과 상식적인 절차를 강조하고 있으나, 유독 교회속에는 공정이나 상식적인 절차 등은 아랑곳 없어
목사와 장로들의 담합으로 결론이 끝나 버린다.
세상은 반드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외치는데 유독 교회속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과 다를 바 없이 편향적이고 권위적인
힘이 모든걸 지배해 버린다.
너희들이 장로들의 전통은 따르면서 하나님의 율법은 져 버리고 있다라고 지적하신 예수의 말씀을 우리는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
하고 뒤돌아 봐야 할 것이다. 교회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 우리 목사님을 해꽂이 하면 천벌 받는다는 논리로 결론을 끝내 버린다.
항상 기준은 성경속 말씀만이 되어야 한다. 그 기준점이 사람의 말로 슬쩍 바뀌어진 상황을 우리들은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유혹되고 현혹되는 지금의 우리들의 믿음의 현실에서 정말 우리들은 좁은 길로 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
지난달, 브라더 혁 집회 실무위원으로 부터 오사카 집회 때 통역을 맡아 달라고 의뢰를 받았다. 한 때는 적지에 뛰어 들어
아주 맛있는 알바 개념으로 거금의 알바비를 챙겨 보겠다고 잘난채하고 의기양양 했었다. 했었다. 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도 그 의뢰를 받았을 때는 도마와 같은 두 마음의 심경이 왕성하게 작동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두 달치 생활비를 하루만에 벌어 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남기로 했다. (인간적으론 솔직히 아깝다,ㅋ)
이토록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처참하게 결투를 벌였던 적이 있었던가 하면서 스스로 너털 웃음과 기가차서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유혹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에게 유혹의 사탕을 던져 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글로나마 표현하고 나니 조금은 후련해 진다. 하마터면 알바비 유혹에 나의 믿음의 정체성을 잃어 버릴 수 있었던 한순간의
아찔한 순간을 지내고 나니 그 다름대로 편안하다.
에바다가 올해로 창립된지 50살이 되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찬양선교단체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아마도 세상속 사회적인 단체라고 한다면 매스컴에도 떳을 것이다.
허나, 지금의 에바다의 모습이 더 어울리고 멋지고 자랑스럽다. 어느 한분이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이런 에바다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이 수다 떨면 듣는 사람이 뻥치지 말라고 한다. 그런게 요즘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핀잔을 듣는다.
너 있는 곳에서 주 찬양하라... 에바다의 프라이드는 이 세상 사는 동안만의 유한적인 감정이요 유한적인 나 스스로의 심취함
이라 하더라도 그 프라이드는 무한하고 값진 보화이며 돈으로 구할 수 없는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왜나하면 20년 전에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된 신앙에서 보이지 않는 말씀속의 그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향후 50년을 이끌고 갈 수 있는 우리들의 후배들이 나타나길 간절히 소망하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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